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도지정유산

창동서원 창동서원 창동서원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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창동서원

  • 종목전북특별자치도 문화유산자료
  • 지정일1984년 04월 01일
  • 소재지정읍시 이평면 창골길 38-27

상세정보

창동서원은 1965(乙巳)년에 유림(儒林)들의 발의(發意)로 창건(創建)하여, 후창(後滄) 김택술(金澤述)을 향사(享祀)했다.
김택술은 1884년인 고종(高宗) 21년(甲申) 6월에 이평면(梨坪面) 창동리(滄東里)에서 출 생(出生)하여 전간재(田艮齋) 선생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, 후창이란 호(號)는 전 간재 선생이 준 것으로 주자(朱子)의 출생지인 창주(滄州)의 뜻을 새겨 주자의 뒤를 이으라 는 뜻으로 지어주었다.

불망실(不忘室), 낙요당(樂要堂)은 유림(儒林)들이 글을 읽던곳이다.
본원이 건립되기 이전에 불망실과 낙요당 이라는 두 개의 건물이 있었는데 이 건물은 그 동안 이 지방 유림들이 모여 글을 읽던 자리로 건립연대는 구 한말(舊 韓末)로 추정된다.
그는 근세(近世)의 학자로 자(字)는 종현(鍾賢)이며, 호(號)는 후창(後滄)이고 부안인(扶安人)이다.

이는 낙진(洛進)의 아들로 1884년인 고종(高宗) 21년(甲申) 6월 이평면 창동(梨 面 滄東里)에서 태어났고 열일곱 되던 해에 천안 금곡(天安 金谷. 忠淸道)에 있는 전간재(田艮齋) 문하(門下)에 들어가 학문을 닦았으며 그 조예(造詣)가 깊으니, 간재가 "후창거사(後滄居士) 창동거사(滄東居士)"의 여덟자를 써 주고 후창(後滄)이라 호(號)를 주었다.
1906년인 고종(高宗) 광무(光武) 10년(丙午)에 최면암(崔勉菴)의 태인(泰仁) 창의(倡義) 에 참가하였으며, 또 연재(淵齋) 송병선(宋秉璿), 지산(志山) 김복한(金福漢)과 도의지교 (道義之交)를 가졌다.

1909년의 친환(親患)에는 손가락을 쪼개여 환자 에게 그 피를 먹였고, 그 뒤 어머니의 상 (喪)을 당하고 석달만에 거듭 조모(祖母)상(喪)을 만나 삼년동안 시묘(侍墓)사리를 하니 효 행으로 이름이 떨치자 왜정(倭政)이 금배(金杯)를 포상했으나 이를 거절하고, 큰 아들 일본 학교(日本學校) 입학을 단호히 반대하였다.
1925년 同門인 오진영(吳震泳)이 스승의 유지(遺旨)를 저버리고 일본 총독(總督)의 허가 를 얻어 문집(文集)을 발간하자 여러 동문의 앞장을 서서 그 죄를 성토하였다. 이 때문에 배일당(排日黨)으로 지목이 되어 여러 차례 곤욕(困辱)을 치루고 광복후 그 수정본(修正本) 을 발행하였다.

1930년 삭발령(削髮令)과 창씨령(創氏令)이 불응하여 일제의 감시대상이 되었으며, 일제 (日帝)가 주는 배급(配給)을 받지않고 솔잎과 감자로 연명(延命)하였다.
왜적(倭賊) 타도의 기회를 엿본다는 뜻으로 불망실(不忘室)을 짓고 후세(後世) 교육에 힘 썼다.
1954년에 세상을 떠나니 1975년 사론(士論)으로 계양사(繼陽祠)에 추배(追配: 追加해서 祭祀지내는 것)하였다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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